샤로시 죄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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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로시 죄르지는 1912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헝가리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그는 1930년부터 1948년까지 페렌츠바로시 TC에서 활약하며 5번의 리그 우승, 4번의 헝가리 컵 우승, 1번의 미트로파컵 우승을 이끌었다. 헝가리 국가대표팀에서는 62경기에서 42골을 기록했으며, 1938년 FIFA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브론즈볼과 브론즈 부트를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감독으로 활동하며 유벤투스를 세리에 A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1999년 월드 사커 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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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로시 죄르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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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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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샤로시 죄르지 |
출생일 | 1912년 8월 5일 |
출생지 |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헝가리 |
사망일 | 1993년 6월 20일 |
사망지 | 제노아, 이탈리아 |
키 | 1.86m |
포지션 | 세컨드 스트라이커 |
선수 경력 | |
유소년 클럽 | 해당 정보 없음 |
클럽 | 1930–1948: 페렌츠바로시 (383경기, 351골) |
국가대표 | 1931–1943: 헝가리 (62경기, 42골) |
감독 경력 | |
감독 | 1948–1950: 바리 1950–1951: 루케세 1951–1953: 유벤투스 1953–1955: 제노아 1955–1956: 로마 1957–1958: 볼로냐 1959: 로마 1960: 브레시아 1962–1963: 루가노 |
수상 내역 | |
메달 | 중부 유럽 국제 컵 동메달 (1931–32 시즌) 중부 유럽 국제 컵 동메달 (1933–35 시즌) FIFA 월드컵 은메달 (1938년 프랑스) |
2. 유년 시절
1912년 8월 5일, 부다페스트에서 Stefancsics György|스테퍼니치치 죄르지hu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나중에 가족의 성씨를 헝가리식인 샤로시로 바꾸었다. 그의 아버지는 재봉사였으며, 슬하에 세 자녀(죄르지, 라슬로, 벨러)를 두었다. 삼남매는 모두 운동선수로 성장했는데,[16][4] 형제인 벨러 샤로시는 축구 선수, 라슬로 샤로시는 수구 선수였다. (라슬로의 동명 아들도 수구 선수였으나, 동시대 동명의 축구 선수와는 관련이 없다.)
1930년, 고향 부다페스트를 연고로 하는 페렌츠바로시 TC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48년 은퇴할 때까지 18년 동안 오직 페렌츠바로시 한 팀에서만 활약하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12] 이 기간 동안 넴제티 버이녹샤그 I 5회 우승, 헝가리컵 4회 우승, 1937년 미트로파컵 우승 등 주요 대회에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48년 36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죄르지는 Reáltanoda utca|레알터노더 가hu의 Eötvös József Gimnázium|에외트뵈시 고등학교hu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축구 외에도 테니스, 탁구, 수구, 육상 등 다양한 운동을 했으며, 기술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뛰어난 전술 이해도와 경기 지능을 보여주었다.[18][11] 학교 축구부는 KISOK 리그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훗날 페렌츠바로시 동료가 되는 Hadа|허더hu와 Lázár|러저루시hu와 함께 뛰었다.[17][5] 페렌츠바로시 유소년팀의 Zsazsa|샤샤hu 감독은 학교 축구부에서 뛰는 그를 눈여겨보았다.[17][5]
그는 15세에 페렌츠바로시 유소년부에 합류했다. 몇 년 후 구단에서 프로 계약을 제의했을 때, 샤로시는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는 '축구는 직업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당시 대공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직 상태였고, 생계에 어려움을 겪던 아버지는 그가 축구 선수로서 성공할 재능이 충분하다며 그를 설득했다.[18][11]
3. 클럽 경력
3. 1. 페렌츠바로시 TC
1930년 고향팀인 페렌츠바로시 TC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48년 은퇴할 때까지 18년 동안 한 팀에서만 활동하며, 통산 383경기에 출전하여 351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12]
18세였던 1931년 3월 15일, 페렌츠바로시와 바스티아의 넴제티 버이녹샤그 I 경기(7:0 승리)에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언론은 그의 활약에 대해 "샤로시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였다. 훌륭한 부코프와 동등하며, 훌륭한 위치 선정, 뛰어난 신체 조건, 높은 수준의 경기 지능을 갖춘, 발전하는 센터하프이자 주요 심판이다. 그는 확실한 국가대표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라고 평가했다. 팀 동료였던 졸탄 블룸은 샤로시의 데뷔를 축하하며 "그는 겨우 소년이었지만, 경기장에서는 공원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경기를 하는 어른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블룸은 또한 "그에게는 정말 쉬워 보였다. 그는 크고, 정말 강하고, 빠르며, 헤딩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는 그런 자신감으로 경기를 펼쳤는데, 심지어 그 나이에도 주장의 자신감으로 경기를 했다. 그는 공을 가지고 수비에서 나와 상대 선수들을 제치고 공격을 시작하곤 했다."고 덧붙였다.
그의 첫 리그 골은 1930-31 시즌 중 1931년 5월 17일과 24일에 열린 페치-바라냐와의 경기에서 기록되었다.
1931년-1932년 시즌 넴제티 버이녹샤그 I 우승은 샤로시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는 부상이나 질병으로 결장한 경기를 제외하고 총 22경기 중 19경기에 출전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32년 9월 8일 열린 헝가리컵 결승전에서는 헝가리아와의 경기에서 3-4로 패배하기도 했다.
샤로시는 페렌츠바로시 소속으로 넴제티 버이녹샤그 I 5회 우승, 헝가리컵 4회 우승, 1937년 미트로파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리그 득점왕 4회, 미트로파컵 득점왕 3회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개인 성과를 거두었다.
1948년, 36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주요 성적'''
대회 | 우승 횟수 | 우승 연도 |
---|---|---|
넴제티 버이녹샤그 I | 5회 | 1931년–1932년, 1933년–1934년, 1937년–1938년, 1939년–1940년, 1940년–1941년 |
헝가리컵 | 4회 | 1933년, 1942년, 1943년, 1944년 |
미트로파컵 | 1회 | 1937년 |
3. 2. 1930-1932: 1군으로 도약
18세였던 1931년 3월 15일, 페렌츠바로시와 바스티아의 리그 경기(7:0 승리)에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언론은 그의 활약에 대해 "샤로시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였다. 훌륭한 부코프와 동등하며, 훌륭한 위치 선정, 뛰어난 신체 조건, 높은 수준의 경기 지능을 갖춘, 발전하는 센터하프이자 주요 심판이다. 그는 확실한 국가대표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라고 평가했다. 졸탄 블룸은 샤로시의 데뷔를 축하하며 "그는 겨우 소년이었지만, 경기장에서는 공원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경기를 하는 어른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블룸은 이어서 "그에게는 정말 쉬워 보였다. 그는 크고, 정말 강하고, 빠르며, 헤딩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는 그런 자신감으로 경기를 펼쳤는데, 심지어 그 나이에도 주장의 자신감으로 경기를 했다. 그는 공을 가지고 수비에서 나와 상대 선수들을 제치고 공격을 시작하곤 했다."라고 덧붙였다.그의 리그 첫 골은 1930-31 시즌 중 1931년 5월 17일과 24일에 열린 페치-바라냐와의 경기에서 기록되었다.
1931-32 시즌의 리그 우승은 샤로시에게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는 부상이나 질병으로 결장한 경기를 제외하고 총 22경기 중 19경기에 출전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1932년 9월 8일, 헝가리아 우트에서 열린 헝가리 컵 결승전에서는 헝가리아에게 3-4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3. 3. 1933-1938: 최고의 시절
1930년대는 샤로시 죄르지의 선수 경력에서 최고의 시기로 평가받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페렌츠바로시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국내 리그인 넴제티 버이녹샤그 I에서는 1934년과 1938년에 우승을 차지했으며, 헝가리컵에서는 1933년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12] 특히 1933년 헝가리컵 결승전에서의 뛰어난 활약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5]
국제 무대에서는 중앙 유럽 클럽 대항전인 미트로파컵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1935년과 1938년에는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으나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고,[6] 1937년에는 마침내 우승컵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2][6] 1937년 대회 우승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은 특히 인상적이었으며, 이 대회에서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6]
샤로시는 이 시기에 리그와 미트로파컵에서 여러 차례 득점왕을 차지하며 개인적인 영예도 함께 누렸다.[12] 또한, 축구 선수로 활동하면서도 학업을 병행하여 1935년 12월부터는 의사(dr.) 자격을 갖추고 경기에 임했다.[6]
3. 3. 1. 헝가리 컵 결승
20세의 샤로시 죄르지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었으며, 1933년 헝가리컵 결승전에서 우이페슈트를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 경기에서 페렌츠바로시는 11-1이라는 압도적인 점수로 승리했다. 당시 우이페슈트는 그 시즌 리그 우승팀이었다. 샤로시 죄르지는 이 경기에서 3골 4도움을 기록했고, 언론은 그를 경기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하며 최고 평점(1)을 부여했다.[5]당시 신문 ''Nemzeti Sport''는 샤로시의 플레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11]
이 경기를 본 사람은 누구나 샤로시의 경기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헝가리 센터 포워드 중 그보다 더 잘 뛰는 선수는 없었다 [...] 샤로시가 처음으로 우이페슈트 수비수들을 제쳤을 때, 모두가 주목했다. 그는 마치 상대가 없는 것처럼 유유히 빠져나갔고, 공을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자신감 있게 움직였다. 이후 그는 또한 뛰어난 감각으로 플레이한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항상 공을 어디로 패스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상황에 맞는 플레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 축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센터 포워드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관중석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렇게 탄식했다. 만약 샤로시 뒤에서 또 다른 샤로시가 센터 하프를 맡아 국가대표팀에서 뛸 수 있다면, 어떤 상대도 우리에게 골칫거리가 되지 않을 텐데! 그는 플레이해야 할 공을 잘 다루었고, 그가 통제해야 할 싸움의 선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샤로시를 통해 우리는 마침내 그가 시간 낭비 없이 쉽게 상대를 속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볼 수 있었고, 항상 상대의 골문을 향해 전진하는 플레이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이 위대한 경기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전율을 일으키는 효과를 주었다.
3. 3. 2. 샤로시의 진화
뛰어난 공 다루는 능력 덕분에 샤로시는 FTC 포메이션에서 점차 전방으로 배치되었다. 처음에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다가 스트라이커로 기용되었다.[6] 1933년 헝가리 컵 결승전에서는 당시 리그 우승팀이었던 우이페슈트를 상대로 페렌츠바로시가 11-1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경기에서 샤로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4개의 도움을 올렸다.[6]그는 17년 동안 페렌츠바로시 유니폼을 입고 활약하는 동안 주로 공격수로 뛰었다. 1935-36 시즌부터 8시즌 연속으로 경기당 평균 최소 한 골을 기록했으며, 헝가리 1부 리그에서 두 차례 득점왕을 차지했다.[6] 또한 샤로시는 미트로파컵 역사상 최다 득점자로 기록되어 있다. 미트로파컵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이탈리아 등 당시 유럽 축구 강국의 클럽들이 참가했던 권위 있는 대회였다.[6]
"귈카"(Gyurkahu)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축구 선수 생활 중에도 학업을 병행하여 의학 학위를 취득, 미래를 준비했다. 1935년 12월 15일 경기부터는 이미 외과 의사 죄르지 샤로시(dr. György Sárosi)로 출전했다.[6]
1935년 미트로파컵에서는 AS 로마에게 원정에서 1-3으로 패했으나, 6월 22일 홈에서 열린 재경기에서 페렌츠바로시가 8-0으로 대승을 거둘 때 샤로시는 4골을 넣었다.[6] 1937년 페렌츠바로시는 미트로파컵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과정에서 샤로시의 활약이 돋보였다. 특히 오스트리아 빈과의 준결승전은 극적이었다. 7월 18일 비엔나 원정 1차전에서는 FTC가 부상 선수가 많은 가운데 1-4로 패했다. 이 경기에서 샤로시는 상대팀의 상징적인 공격수 마티아스 신델라르를 잘 막아냈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6] 그러나 7월 25일 부다페스트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샤로시가 공격수로 복귀하여 2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며 팀의 6-1 대승을 이끌었다. 이 결과 페렌츠바로시는 합계 7-5로 결승에 진출했으며, 이 경기는 샤로시 선수 경력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경기 후 팬들은 샤로시를 어깨에 태우고 환호했으며, 샤로시 본인도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하고 큰 기쁨을 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미하이 파타키는 "이 오스트리아 팀을 꺾은 것은 유럽 전체가 주목할 만한 엄청난 성과"라고 평가했다.[6]
샤로시는 페렌츠바로시가 미트로파컵에서 1937년 우승하고 1935년과 1938년에 준우승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6]
3. 3. 3. 미트로파컵 결승
샤로시는 미트로파컵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선수로 남아 있다. 이 대회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이탈리아 등 유럽 축구 강국 클럽들이 참가하는 권위 있는 대회였다.[6] 그는 페렌츠바로시 소속으로 1935년과 1938년에 준우승을 경험했고, 1937년에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6]1937년 미트로파컵 준결승 상대는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비엔나에서 열린 1차전에서 샤로시는 상대 팀의 상징적인 스트라이커 마티아스 신델라르를 효과적으로 막아냈지만, 팀은 부상 여파로 4-1로 패배했다. 그러나 부다페스트의 홈 구장 울뢰이 우트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샤로시가 다시 공격수로 나서 2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펼쳤고, 페렌츠바로시는 디펜딩 챔피언 오스트리아 빈을 6-1로 대파하며 합계 7-5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6] 이 경기는 샤로시 본인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라고 회상할 정도로 인상적이었으며, 팀 동료였던 미하이 파타키는 "이 오스트리아를 꺾는 것은 유럽 전체가 주목하는 엄청난 성과"라고 평가했다.[6]
결승 상대는 이탈리아의 라치오였다. 1937년 9월 12일,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페렌츠바로시는 4-2로 승리했다.[6] 10월 24일 로마에서 열린 2차전은 매우 극적이었다. 라치오의 공격수 피올라가 경기 시작 17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페렌츠바로시를 압박했다. 후반전은 폭우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라치오가 4-3으로 앞선 상황에서 페널티킥을 얻었으나 페렌츠바로시 골키퍼 하다의 선방으로 위기를 넘겼다. 10분 뒤 키스가 동점골을 넣었고, 경기 종료 10분을 남기고 샤로시가 환상적인 결승골을 터뜨렸다. 그는 골대를 등진 상태에서 달려오던 공을 오른발로 감각적으로 차 넣어 골망을 흔들었다. 샤로시는 이 골을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결국 페렌츠바로시는 2차전에서도 5-4로 승리하며 합계 9-6으로 미트로파컵 우승을 차지했다.[6]
시상식에서 샤로시는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우승컵을 받았고, 팀 동료들과 함께 헝가리 국가를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1937년 미트로파컵에서 총 12골 2도움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특히 결승 두 경기에서만 6골 1도움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2차전 활약으로 언론으로부터 평점 1점을 받으며 경기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다.[6]
당시 경기와 샤로시의 활약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 "나는 평생 이런 경기를 본 적이 없으며, 축구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 조반니 리카르디[6]
: "나는 샤로시를 최고의 예술가로 여겼지만, 이제는 그를 최고의 전략가로도 생각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리한 축구 선수입니다!" - 심판 뷔트리히[6]
: "페렌츠바로시의 공격 라인은 훌륭한 악기이며, 그 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리더 샤로시가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했습니다. 페렌츠바로시는 완벽하게 승리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 II Piccolo[6]
3. 4. 1939-1948: 말년과 은퇴
1939년-1940년 시즌, 페렌츠바로시는 리그에서 골득실 차이로 우승을 차지했다. 1940년-1941년 시즌에는 샤로시 죄르지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페렌츠바로시가 11점이라는 큰 점수 차로 리그 정상에 올랐다. 샤로시 본인도 이 시즌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헝가리컵에서도 1942년, 1943년, 1944년에 연이어 우승하며 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1948년 4월 18일, 샤로시는 부다페스트의 Üllői út 경기장에서 열린 바사스와의 홈 경기를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페렌츠바로시는 이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으며, 샤로시는 훌륭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자신을 아끼는 관중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경기 종료 후 팬들은 그의 애칭인 "귈카, 귈카"를 연호하며 샤로시를 어깨에 메고 경기장을 떠났다. 당시 팬들은 이것이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4월 19일 월요일, 샤로시는 정식 여권을 가지고 헝가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탈리아에서 거주하게 된다. 이로써 36세의 나이로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4. 국가대표팀 경력
헝가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931년부터 1943년까지 활동하며 총 62경기에 출전하여 42골을 기록했다.[12] 그는 1934년 FIFA 월드컵과 1938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특히 1938년 FIFA 월드컵에서는 팀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월드컵 브론즈볼과 브론즈 부트를 수상했으며, 대회 올스타팀에도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4. 1. 수비수로 시작
국가대표 경력은 1931년 5월, 18세의 나이로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시작되었다. 이 데뷔전은 2-3 패배로 끝났다. 데뷔 초 샤로시는 수비수로 뛰었으며, 국가대표 두 번째 경기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유명 공격수 안토닌 푸치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팀의 3-0 승리에 기여했다.수비수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그는 국가대표 15번째 경기에 이르러서야 공격수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시험받게 되었다. 공격수로 나선 첫 경기였던 스웨덴전에서 바로 골을 기록하며 공격수로서의 재능도 보여주었다.
4. 2. 월드컵 1934
샤로시 죄르지는 1934년 FIFA 월드컵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이집트와의 첫 경기에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와의 8강전에 출전할 수 있었다. 경기 60분에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골을 기록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헝가리는 결국 오스트리아에 1-2로 패배했다.당시 헝가리 스포츠 신문인 ''Nemzeti Sport''는 샤로시의 경기력에 대해 평소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며 매우 가혹하게 비판했다. 신문은 샤로시가 "부드럽고, 약하고, 창백했으며", "진짜 샤로시의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가하며, 결정적인 상황에서의 패스 실패 등을 지적했다.
샤로시는 1934년 월드컵에서 단 한 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4. 3. 헝가리 8-3 체코슬로바키아
샤로시가 헝가리 대표팀에서 보여준 최고의 경기 중 하나는 1937년 중앙 유럽 국제컵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펼쳐진 경기였다. 당시 헝가리는 전반 30분경 1-2로 뒤지고 있었으나, 주장 샤로시가 당시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꼽히던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를 상대로 무려 7골을 터뜨리며 팀의 8-3 대승을 이끌었다.헝가리의 스포츠 신문 ''Nemzeti Sport''는 당시 경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전반전은 2-2로 끝났으나, 후반전에 샤로시를 포함한 헝가리 선수들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샤로시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2-3명의 수비수를 달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효과적으로 운반하며 경기를 지배했다. 그의 활약에 관중들은 "Gyurka, Gyurka" (죄르지의 애칭)를 연호하며 열광했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흥분한 관중들이 경기장으로 몰려나와 샤로시를 어깨에 메고 나갔다. 신문은 샤로시를 "헝가리 축구의 예술가"이자 "유럽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선수 중 한 명"이라고 극찬했다.
당시 헝가리 대표팀 감독이었던 카로이 디에츠는 "국제 경기에서 7골을 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위대한 플라니치카를 상대로 해냈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고 말하며 샤로시를 그의 시대 최고의 골잡이로 평가했다. 상대 골키퍼였던 플라니치카 또한 경기 후 만찬에서 샤로시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축하하며 "당신 같은 선수에게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스포츠 신문 케페스 스포츠는 샤로시의 경이로운 활약에 대해 이례적으로 '-1점'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당시 일반적인 평가 시스템은 '1점=세계적 수준, 2점=좋음, 3점=보통, 4점=나쁨, 5점=끔찍함'이었으나, 세계 최고 수준의 골키퍼를 상대로 7골을 넣은 샤로시에게는 특별한 평가를 적용한 것이다.
이 경기에서의 7골은 샤로시가 1936-38 중앙 유럽 국제컵에서 총 1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득점 기록은 훗날 푸스카스 페렌츠가 다음 대회에서 타이를 이루게 된다.[7] 샤로시는 중앙 유럽 국제컵에서 통산 17골을 기록하여, 현재까지 대회 역대 최다 득점자로 남아있다.
4. 4. 월드컵 1938
프랑스에서 개최된 1938년 FIFA 월드컵에서 샤로시는 헝가리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월드컵 브론즈볼과 브론즈 부트를 수상했으며, 대회 올스타팀에도 선정되었다.헝가리의 첫 경기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와의 경기였고, 헝가리는 6-0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샤로시는 이 경기에서 25분과 89분에 두 골을 기록했다. 경기 후 그는 상대 팀에 대해 "그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했고, 거칠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두 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언론은 샤로시가 이 경기에서 기대만큼의 큰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두 번째 경기인 스위스전에서도 샤로시는 골을 기록하며 팀의 2-0 승리와 다음 라운드 진출에 기여했다. 이 경기에서 샤로시는 좋은 기량을 선보여 언론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명성을 고려할 때 더 나은 활약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준결승전인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헝가리는 5-1로 크게 승리했다. 샤로시는 이 경기에서 1골과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당시 헝가리 스포츠 신문 ''Nemzeti Sport''는 그의 활약에 대해 "그는 거의 최고의 기량에 도달했으며 [...] 파리에서 그의 수준에 도달하기 시작한 헝가리 미드필더로부터 많은 훌륭한 플레이를 보았다 [...] 그는 바람에 훌륭한 롱볼을 뿌렸다. 전반적으로 그는 관대하고 경이로운 지능을 가진 미드필더이다"라고 극찬했다.
결승전은 파리의 스타드 올랭피크 드 콜롬브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열렸다. 약 55,000명의 관중이 모였으나, 개최국 프랑스의 탈락으로 인해 경기장은 만석이 되지 않았다. 많은 관중들은 헝가리의 유려한 공격 축구와 주장 샤로시가 비토리오 포초 감독이 이끄는 이탈리아 팀(당시 뛰어난 센터 포워드 실비오 피올라 보유)을 상대로 어떤 경기를 펼칠지 주목했다. 샤로시는 후반 25분(70분)에 골을 넣어 점수를 3-2로 만들었으나, 이미 이탈리아가 3-1로 앞서가던 상황이었다. 이탈리아는 뛰어난 수비력을 바탕으로 헝가리의 공격을 막아냈고, 골든볼 수상자인 실비오 피올라가 후반 32분(77분)에 쐐기골을 넣어 4-2로 승리하며 2회 연속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샤로시는 이 경기에서 좋은 시야를 보여주며 괜찮은 경기를 펼쳤지만, 이탈리아 수비에 막혀 패스가 자주 차단되었다. ''Nemzeti Sport''는 "그의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빠르고 강력한 이탈리아 수비에 막혔다. 그의 영리한 플레이는 좌초되었고, 패스는 이탈리아 수비수들에게 먼저 차단당했다"고 평가하며 그에게 "평균" 수준인 3점의 평점을 부여했다.
샤로시는 1938년 월드컵 4경기에서 총 5골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특히 그는 이 대회 녹아웃 스테이지의 모든 경기(16강, 8강, 4강, 결승)에서 득점했는데, 이는 84년 후인 2022년 FIFA 월드컵에서 리오넬 메시가 달성하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다. 그의 1938년 월드컵 활약은 헝가리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감독 경력
1948년 선수에서 은퇴한 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1963년까지 15년 동안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프로팀 감독을 맡았으며, 유벤투스, AS 로마 등 세리에 A의 클럽들을 지휘했다. 특히 세리에 A 1951-52 시즌에는 유벤투스 FC의 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1963년 스위스의 FC 루가노를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도 은퇴했다.
6. 플레이 스타일
샤로시는 역대 가장 완벽한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1930년대 중반, 그는 이탈리아의 ''라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독일의 ''키커'', 프랑스의 ''로토'' (현 ''레키프'')에서 발표한 유럽 올스타팀에 모두 선정되었다. 주목할 점은 세 매체가 페렌츠바로시와 헝가리 대표팀의 핵심 선수였던 샤로시를 각기 다른 포지션으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라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는 그를 센터백으로, ''키커''는 미드필더로, ''로토''는 공격수로 뽑았다. 이는 샤로시가 여러 포지션을 소화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을 발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본래 인사이드 포워드와 센터 포워드였던 그는 세계적인 수준의 센터 하프나 국제적인 수준의 중앙 수비수로도 활약할 수 있었으며, 선수 경력 초기와 후기에 실제로 이 역할들을 수행했다. 샤로시는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뛰어난 드리블러이자 득점가였으며, 강력한 리더십과 뛰어난 팀워크 능력, 그리고 훌륭한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7. 수상 내역
- 월드컵 브론즈 볼: 1938[18]
- 월드컵 브론즈 부트: 1938[18]
- 월드컵 올스타 팀: 1938
- 중부 유럽 선수권 대회 득점왕: 1933–35
- 미트로파컵 득점왕: 1935, 1937, 1940
- 헝가리 리그 득점왕: 1935–36, 1939–40, 1940–41
- 헝가리 리그 비공식 득점왕: 1944
- 월드 사커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100인
7. 1. 선수
1930년 고향팀 페렌츠바로시 TC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48년 은퇴할 때까지 18년간 한 팀에서만 활약한 원클럽맨이다. 그는 페렌츠바로시 소속으로 383경기에 출전해 351골을 기록하며 헝가리 리그 5회, 헝가리 컵 4회, 1937년 미트로파컵 우승 등 다수의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1] 리그 득점왕 4회, 미트로파컵 득점왕 3회 등 개인적인 성과도 뛰어났다.헝가리 국가대표팀에서는 1931년부터 1943년까지 62경기에 출전하여 42골을 넣었다[12]. 특히 1938년 FIFA 월드컵에서는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브론즈볼과 브론즈 부트를 수상하며 올스타팀에도 선정되었다.
선수 은퇴 후에는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1999년 월드 사커 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100인 중 88위에 이름을 올렸다.
7. 1. 1. 클럽
1930년, 고향 부다페스트를 연고로 하는 페렌츠바로시 TC에 입단했다.[11] 1948년 은퇴할 때까지 18년 동안 페렌츠바로시 한 팀에서만 활동했으며 통산 383경기에 출전하여 351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는 팀의 헝가리 리그 5회 우승, 헝가리 컵 4회 우승, 1937년 미트로파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11] 개인적으로는 리그 득점왕 4회, 미트로파컵 득점왕 3회를 차지했다. 1948년, 36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대회 | 우승 연도 | 횟수 |
---|---|---|
헝가리 리그 | 1932, 1934, 1938, 1940, 1941 | 5회 |
헝가리 컵 | 1933, 1942, 1943, 1944 | 4회 |
미트로파컵 | 1937 | 1회 |
7. 1. 2. 국가대표
헝가리 국가대표팀으로 1931년부터 1943년까지 활동하며 62경기에 출전하여 42골을 기록했다[12]. 1934년 FIFA 월드컵과 1938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특히 1938년 대회에서는 5골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월드컵 브론즈볼과 브론즈 부트를 수상했고, 월드컵 올스타팀에도 선정되었다. 또한 중앙 유럽 국제 컵에서는 1931-32 시즌과 1933-35 시즌에 3위를 차지했다.7. 2. 감독
1948년 선수 은퇴 후 지도자로 활동하며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지에서 감독직을 역임했다. 유벤투스 FC 감독 시절인 1951-52 시즌에는 팀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1963년 FC 루가노 감독직을 끝으로 은퇴했으며, 1993년 제노아에서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7. 2. 1. 클럽
1948년 선수 은퇴 후 지도자로 활동했다. 1963년까지 15년간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프로팀 감독을 맡았다. 특히 유벤투스 FC 감독 시절인 1951–52 시즌에는 팀을 세리에 A 우승으로 이끌었다. 1963년 스위스의 FC 루가노 감독직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7. 2. 2. 개인
8. 통계
샤로시 죄르지는 선수 경력 대부분을 페렌츠바로시 TC에서 보냈으며, 클럽 통산 공식 경기 450경기에 출전하여 421골을 기록했다.[8] 이 중 헝가리 리그에서는 384경기에 출전하여 350골을 넣는 뛰어난 득점력을 보였다.[8]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는 62경기에 출전하여 42골을 기록했다.[12][9]
8. 1. 클럽
1930년 고향팀인 페렌츠바로시 TC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8] 1948년 은퇴할 때까지 18년 동안 페렌츠바로시 한 팀에서만 활동하며 통산 리그 384경기에서 350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8] 이 기간 동안 팀의 넴제티 버이녹샤그 I 5회 우승(1931–32, 1933–34, 1937–38, 1939–40, 1940–41), 헝가리 컵 4회 우승(1932–33, 1941–42, 1942–43, 1943–44), 1937년 미트로파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8] 또한 리그 득점왕 4회, 미트로파컵 득점왕 3회를 차지했다.[8] 1948년, 36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8]'''클럽 통계'''[8]
시즌 | 클럽 | 리그 | 넴제티 버이녹샤그 I | 머저르 쿠퍼 | 미트로파컵 | 합계 | ||||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
1930–31 | 페렌츠바로시 | 넴제티 버이녹샤그 I | 7 | 2 | 4 | 0 | — | 11 | 2 | |
1931–32 | 19 | 4 | 2 | 0 | 2 | 3 | 23 | 7 | ||
1932–33 | 22 | 8 | 3 | 5 | — | 25 | 13 | |||
1933–34 | 20 | 24 | — | 5 | 7 | 25 | 31 | |||
1934–35 | 20 | 22 | 4 | 6 | 8 | 9 | 32 | 37 | ||
1935–36 | 21 | 37 | — | 2 | 4 | 23 | 41 | |||
1936–37 | 19 | 29 | — | 9 | 12 | 28 | 41 | |||
1937–38 | 20 | 29 | — | 8 | 7 | 28 | 36 | |||
1938–39 | 20 | 26 | — | 6 | 2 | 26 | 28 | |||
1939–40 | 23 | 23 | — | 2 | 6 | 25 | 29 | |||
1940–41 | 22 | 29 | 1 | 0 | — | 23 | 29 | |||
1941–42 | 19 | 19 | 2 | 4 | — | 21 | 23 | |||
1942–43 | 15 | 6 | 2 | 3 | — | 17 | 9 | |||
1943–44 | 28 | 11 | 6 | 3 | — | 34 | 14 | |||
1944 | 13 | 14 | — | — | 13 | 14 | ||||
1945 | 18 | 16 | — | — | 18 | 16 | ||||
1945–46 | 31 | 31 | — | — | 31 | 31 | ||||
1946–47 | 29 | 15 | — | — | 29 | 15 | ||||
1947–48 | 18 | 5 | — | — | 18 | 5 | ||||
총계 | 384 | 350 | 24 | 21 | 42 | 50 | 450 | 421 |
'''우승 기록'''
- 헝가리 리그 (5회): 1931–32, 1933–34, 1937–38, 1939–40, 1940–41
- 헝가리 컵 (4회): 1932–33, 1941–42, 1942–43, 1943–44
- 미트로파컵 (1회): 1937
8. 2. 국가대표
헝가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931년부터 1943년까지 활동하며 총 62경기에 출전하여 42골을 기록했다.[12] 그는 1934년 FIFA 월드컵과 1938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특히 1938년 FIFA 월드컵에서는 5골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이 활약으로 월드컵 브론즈볼과 브론즈 부트를 수상했으며 대회 올스타팀에도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연도별 국가대표 출전 및 득점 기록은 다음과 같다.
9. 국가대표 득점 기록
:''헝가리의 점수가 먼저 표시되며, 점수 열은 각 샤로시의 골 이후의 점수를 나타냅니다.''
번호 | 출장 | 날짜 | 장소 | 상대 | 점수 | 결과 | 대회 |
---|---|---|---|---|---|---|---|
1 | 15 | 1933년 7월 2일 | 로순다 스타디움, 솔나, 스웨덴 | 스웨덴 | 1–0 | 2–5 | 친선 경기 |
2 | 19 | 1934년 3월 25일 | 스태디온 벌가르스카 아르미야, 소피아, 불가리아 | 불가리아 | 1–1 | 4–1 | 1934년 FIFA 월드컵 예선 |
3 | 20 | 1934년 4월 15일 | 호헤 바르테 스타디움, 빈, 오스트리아 | 오스트리아 | 1–0 | 5–2 | 친선 경기 |
4 | 2–2 | ||||||
5 | 21 | 1934년 4월 29일 | 레트나 스타디움, 프라하, 체코슬로바키아 | 체코슬로바키아 | 1–1 | 2–2 | 1933-35 중부 유럽 국제컵 |
6 | 2–2 | ||||||
7 | 22 | 1934년 5월 10일 | 위외이 우티 스타디온, 부다페스트, 헝가리 | 잉글랜드 | 2–0 | 2–1 | 친선 경기 |
8 | 23 | 1934년 5월 31일 | 스타디오 리토리알레, 볼로냐,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 1–2 | 1–2 | 1934년 FIFA 월드컵 |
9 | 24 | 1934년 10월 7일 | 헝가리아 쾨루티 스타디온, 부다페스트, 헝가리 | 오스트리아 | 1–1 | 3–1 | 1933-35 중부 유럽 국제컵 |
10 | 2–1 | ||||||
11 | 25 | 1934년 12월 9일 | 산 시로, 밀라노, 이탈리아 | 이탈리아 | 1–0 | 2–4 | 친선 경기 |
12 | 27 | 1935년 5월 12일 | 위외이 우티 스타디온, 부다페스트, 헝가리 | 오스트리아 | 2–0 | 6–3 | |
13 | 4–3 | ||||||
14 | 5–3 | ||||||
15 | 29 | 1935년 10월 6일 | 프라터슈타디온, 빈, 오스트리아 | 오스트리아 | 3–2 | 4–4 | 1933-35 중부 유럽 국제컵 |
16 | 30 | 1935년 11월 10일 | 위외이 우티 스타디온, 부다페스트, 헝가리 | 스위스 | 4–0 | 6–1 | 친선 경기 |
17 | 5–1 | ||||||
18 | 31 | 1935년 11월 24일 | 아레나 치비카, 밀라노, 이탈리아 | 이탈리아 | 1–0 | 2–2 | 1933–35 중부 유럽 국제컵 |
19 | 2–2 | ||||||
20 | 32 | 1936년 3월 15일 | 헝가리아 쾨루티 스타디온, 부다페스트, 헝가리 | 독일 | 3–2 | 3–2 | 친선 경기 |
21 | 33 | 1936년 5월 3일 | 아일랜드 자유국 | 1–0 | 3–3 | ||
22 | 2–2 | ||||||
23 | 37 | 1937년 4월 11일 | 스타디온 란크호프, 바젤, 스위스 | 스위스 | 1–0 | 5–1 | 1936–38 중부 유럽컵 |
24 | 40 | 1937년 9월 19일 | 헝가리아 쾨루티 스타디온, 부다페스트, 헝가리 | 체코슬로바키아 | 2–2 | 8–3 | |
25 | 3–2 | ||||||
26 | 4–2 | ||||||
27 | 5–2 | ||||||
28 | 6–3 | ||||||
29 | 7–3 | ||||||
30 | 8–3 | ||||||
31 | 41 | 1937년 10월 10일 | 프라터슈타디온, 빈, 오스트리아 | 오스트리아 | 1–0 | 2–1 | |
32 | 42 | 1937년 11월 14일 | 위외이 우티 스타디온, 부다페스트, 헝가리 | 스위스 | 1–0 | 2–0 | |
33 | 43 | 1938년 6월 5일 | 스타드 뮤니시팔 벨로드롬, 랭스, 프랑스 | 네덜란드령 동인도 | 3–0 | 6–0 | 1938년 FIFA 월드컵 |
34 | 6–0 | ||||||
35 | 44 | 1938년 6월 12일 | 스타드 빅토르 부케이, 릴, 프랑스 | 스위스 | 1–0 | 2–0 | 1938년 FIFA 월드컵 |
36 | 45 | 1938년 6월 16일 | 파르크 데 프랭스, 파리, 프랑스 | 스웨덴 | 4–1 | 5–1 | 1938년 FIFA 월드컵 |
37 | 46 | 1938년 6월 19일 | 스타드 올랭피크 드 콜롱브, 파리, 프랑스 | 이탈리아 | 2–3 | 2–4 | 1938년 FIFA 월드컵 결승 |
38 | 47 | 1938년 12월 7일 | 아브록스 스타디움,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 스코틀랜드 | 1–3 | 1–3 | 친선 경기 |
39 | 54 | 1939년 11월 12일 | 베오그라드스키 SK 스타디움, 베오그라드, 유고슬라비아 | 유고슬라비아 | 1–0 | 2–0 | |
40 | 55 | 1940년 3월 31일 | 위외이 우티 스타디온, 부다페스트, 헝가리 | 스위스 | 1–0 | 3–0 | |
41 | 3–0 | ||||||
42 | 57 | 1940년 5월 19일 | 루마니아 | 1–0 | 2–0 | 1940-41 다뉴브컵 |
10. 말년과 죽음
1976년 7월, 샤로시는 처음으로 고국 헝가리를 방문했다. 7월 20일에는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축구 선수 생활 이후 유럽을 많이 여행했던 그는 한 기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어디냐고 묻자, 항상 한 도시를 꼽았다: "부다페스트의 페렌츠바로시. 그곳은 꿈결 같았던 20년, 즉 내 축구 선수 생활 기간 동안 내가 Üllői Úti 구장에서 보냈던 좁은 무대였다 [...] 프라디(페렌츠바로시의 애칭)의 이야기와 내 삶은 완전히 얽혀 있고, 내 안에서 뒤얽혀 있다."
1977년까지 여러 클럽 감독을 맡았던 그는 이후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1993년 6월 19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사망했으며 그곳에 묻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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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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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ersatile virtuoso of Hungary & F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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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201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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